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풍전쟁 (문단 편집) === 펑위샹의 호당구국군 합류 === [[1차 장계전쟁]] 당시 동북사성의 치안유지 때문에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던 장쉐량은 장풍관계의 악화가 가시화되자 전과 달리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양해를 얻어 장쭝창에게 탄환 70만 발을 제공했고 4월 19일 오전 5시, 경봉열차를 통해 군사 200명에게 38식 장총탄환 2화차, 추격포 20문, 수제식 기관총 1000정, 포탄 4회차를 산해관으로 수송함으로 펑위샹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장제스도 4월 28일 우톄성을 봉천에 파견하여 장쉐량과 반풍동맹 체결을 모색했다. 장쉐량은 매우 적극적인 중앙옹호를 표명했다. 한편 베이핑과 톈진의 서산파들은 반장선언을 발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반장세력들이 반장대동맹을 체결할 것을 호소하며 당무통일을 위한 국민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서산파는 [[쉬충즈]]를 중심으로 펑위샹과 접촉했다. 펑위샹은 이에 반색하며 [[쩌우루]] 등을 초청하여 회담했고 쩌우루는 펑위샹, 옌시산을 만나 인민 자유 보장, 기본법 제정, 당원에게 당권 반환 등을 주장했다.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적극 동조했지만 옌시산은 애매한 반응을 보이면서 반장의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서산파와의 합작으로 고무된 펑위샹은 난징에 파견한 대표들을 카이펑으로 철수시키고 장계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장제스의 공세가 하남으로 향할 것이라 예상하여 카이펑에서 고급군사회의를 개최하여 4월 28일 장제스의 공격에 맞서 [[한푸쥐]], [[스여우싼]], [[마훙쿠이]] 등에게 병력을 통솔하여 하남성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산동반도의 병력도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5월 2일 난징에 머무르던 2집단군 소속 인물들이 일제히 철수했고 산동의 손양성도 철수함으로 펑위샹의 반중앙 움직임은 노골화되었다. 장제스는 4월과 5월에 걸쳐 펑위샹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군정부장 자리를 수행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펑위샹은 이를 거절했고 4월 22일에는 장제스가 친서까지 보내 5월 10일까지 와달라고 한 요청도 무시했다. 이에 장제스는 스여우싼, 한푸쥐 등을 포섭할 준비를 하면서 제2집단군 견제에 들어갔다. 5월 13일 펑위샹도 카이펑과 정저우에 주둔한 한푸쥐, 스여우싼의 병력을 섬서로 철수시키면서 장제스의 추격을 막기 위해 모든 철로를 파괴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명령으로 인하여 평한철로와 농해철로, 무승관 터널, 황하의 철교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하남의 부대들도 모두 흥안 일대로 철수시켰다. 펑위샹의 병력은 동관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5월 13일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전보를 보내 1집단군과 2집단군 사이의 군비 배분이 동등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차별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위형편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며 전국의 세금이 중앙에 귀속되면 더 이상 차별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니 입경하여 유언비어에 맞서자고 그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장제스의 회유를 무시, 5월 15일 손양성, 한푸쥐(韓復榘)의 추대를 받아 '호당구국군 섬서로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펑위샹은 3전대회와 중앙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했다. 펑위샹은 중앙정부의 차별에 대항한 것이라고 병사들을 선동하는 한편 일부러 급료지급을 중단하여 병사들의 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중앙에 반대하는 통전을 보내 중앙과 삼중전회의 잘못을 비판하며 장제스 하야를 요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